2012년 8월 29일 수요일

[오피니언] 우리 가슴에 뚫린 구멍


경향신문_ 우리 가슴에 뚫린 구멍


얼마 전 복날이 지났다. 그날을 위해 태어나 한 달이 조금 넘게 살다 맛난 국물과 부드러운 살을 남기고 사라진 닭들이 있다. ! 닭이 아니지. 그 병아리들은 기계에서 태어나, 폐쇄된 공간에서 햇빛 한줌 보지 못하고 제 수명의 200분의 1도 살지 못한 채 식탁에 올랐다. (만약 그 닭이 자연에서 태어나 제 수명을 채웠다면 무려 25년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공장식 밀집사육, 항생제 과다투여, 건강하지 못한 고기 뭐 이런 소식을 들으면 무척 찜찜해 하다가도, 고소함에 길들여진 혀를 어떻게 바꾸지는 못한다.

경남 고성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목줄을 푼 진돗개가 달려 들어 사람을 문 사건이 있었다. 사고가 일어나자 개 주인은 사고 2시간 만에 개를 개장수에게 팔아버렸고, 경찰은 수소문 끝에 도살된 개(그러니까 개고기)를 찾아 광견병 검사를 의뢰했다. 애완견을 반려견이라 부르는 세상이라 해도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애정을 주고 기르던 개를 개장수에게 팔아 도살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경기도 용인의 사육장을 탈출한 반달곰 두 마리가 모두 사살되었다. 그런데 가슴엔 총알 구멍 말고도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 곰 가슴에 생긴 저 흔적은 무엇일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움푹 패인 흔적이 살아있는 곰의 쓸개즙(웅담)을 빼기 위한 구멍이란 걸 안다. 왜냐하면 이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니까.

불과 지난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다. , 내일이 되어도 별반 달라질 건 없다. 사육장에서는 애완용도 아니고, 식용도 아닌 곰 가슴에 구멍을 내 쓸개즙을 뽑아낼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며 기르던 개도 때가 되면 도살되어 고기가 될 것이다. 제 수명의 200분의 1도 살지 못하는 병아리들이 단지 우리의 입맛과 단백질을 위해 공장에서 생산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어디에서 생명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욕망에 충실한 괴물이 되어, 반달곰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쓸개즙을 뽑아낸다.

어디 반달곰 가슴뿐이랴. 반달곰 가슴에 뚫린 구멍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가슴의 구멍이다. 복잡하게 숫자를 들어 설명하지 않아도 살기가 참 팍팍하다. 인간의 삶을 규정할 사랑, 자비, 희망 이런 단어는 내세에서나 가능한 종교적 구호가 되었고, 공정, 정의, 복지 같은 단어는 허망한 정치 슬로건으로만 남았다. 총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생명의 존엄을, 자존감을 지켜주지 못한다. 열 살짜리 여자 아이를 납치해 살해하고 스스로 목격자라 칭하며 인터뷰를 하는 이의 얼굴을 봐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뉴스에 놀라지 않을 내성을 지니기 위해 내 가슴에 난 구멍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임기 내내 ‘상왕’이라는 전근대적 표현으로 호칭된 대통령의 형이나, ‘멘토’라는 유행어로 포장된 측근이 모조리 감옥에 들어가는 꼴을 보면서 아이쿠! 저 도적놈들! 화병이 나기보다는 가슴에 구멍을 더 크게 만들어 흘려 보내야 한다. 커다란 구멍으로 휭, 바람이 지나가듯, 이런저런 소식에 가슴의 구멍은 조금씩 더 커진다.

우리는 가슴에 난 구멍을 메우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나보다 약한 이들이나 소수자들을 찾아내 조롱하고, 증오하고, 분노한다. 놀이를 빼앗긴 어린이들,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 피곤한 노동에 내몰린 어른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장년들까지. 인간의 존엄과 자존감을 빼앗겨 가슴에 구멍 뚫린 우리는 타인의 존엄과 자존감을 깎아내어 구멍을 메우려 한다. 우린 모두 정상이 아니다.

모두들 이 상황이 비정상이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치유’다. 다만, 모두들 고침을 받고 싶어 할 뿐이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 봐야, 내 가슴의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다. 그저 치유 장수들의 배만 불린다. 내 가슴의 구멍은 내가 메워야 한다. 우리 함께 치유하자.

첫 번째. 내 가슴에 난 구멍을 바라보자. 내 가슴에 구멍이 나 있음을 인정하자. 위로나 치유의 말처럼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에 난 구멍은 날 괴롭게 한다. 그래도 인정하자. 두 번째, 내 쓸개즙에 박힌 고무관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확인하자. 나의 희생을 담보 삼아 쓸개즙을 빼는 이들이 누군가를, 확실하게 바라보자. 세 번째, 그들의 협박이나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이 학원이 아니면, 이 회사가 아니면, 이 프로젝트가 아니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고 소리치는 이들을 멀리하자. 좀 불안해도, 결별할 것과 결별하자. 당연히 쓸개즙에 박힌 관을 뽑아내면 쓰디쓴 쓸개즙이 흘러나올 것이다. 무척 아프겠지만, 헛된 욕망과 결별하고 내 진짜 욕망을 찾아보자. 그게 좀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괜찮다.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知識,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1. 국시가 휩쓸고 간 노트_ 개,말,소,돼지... 멘.붕.

                 #2. 국시가 휩쓸고간 노트_ 쥐새끼들


     국시가 휩쓸고간 노트의 필기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내 머릿속은 하얗게 된지 오래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온 지식의 양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바닷물 한 티스푼 보다 못한 것 같다 

     아니, 내가 과연 바닷가에 도달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의 무지함에 좌절이 밀려오던 찰나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보여지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많은 위안을 준다...



     [퍼옴]
     '앎'으로 가는 길,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삶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등에' 혹은 '산파'라 칭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무지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태연하게 잠을 잔다. 이때 그를 따끔하게 깨우는 것이 '등에'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끝없이 묻는 것이다. 
       '왜?' '그것은 무엇이냐?' 라고 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잘난 척 하는 정치인에게 소크라테스는 질문한다.
       '정치란 무엇이냐?' , '민심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민심이란 무엇이냐?',   '민중들의 의지이다.'
       '민중이란 무엇이고 의지란 무엇이냐?' '그것은 어찌 알 수 있느냐? '

       이런 질문이 계속 되다보면  결국 아주 새카만 무지만 남는다. 
      정치인은 정치가 자신의 전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이면 
      자기 전공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버리고 만다.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 
      "너 자신을 알라" 

     
    Hmm.. 
  결국 나 또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French movie (Le Concert) : Tchaikowsky's Violin Concerto in D!!



김동률-감사

2012년 8월 12일 일요일

늦여름의 넋두리



BGM. 옆 나무 아직도 짝을 못찾은 매미의 구슬픈 울음소리



식을줄 모르던 무더위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여름 열기보다 더 뜨겁던 올림픽도 잠들어 있는사이 지나갔습니다.
약 반나절도 안남은 나의 홀리데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집안 곳곳 솜뭉치를 만들어내던 밤톨이의 털갈이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포도껍질 하나에도 신나게 비행하던 하루살이 무리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밤마다 노동하던 선풍기의 처량한 뒷모습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출근길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과의 반가웠던 만남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덕수궁길의 아련함도 일터의 매너리즘 속에 무미건조한 돌담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짝을 찾기 위해 목놓아 울던 매미들의 향연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중산층의 조건


     우리나라가 G20에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선진국으로서 나아갈 길이 참 멀다고 느끼게 되는 하나의 증거.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성장 시대의 종언

[녹색평론]제 125호 7-8월호

 

성장시대의 종언 본문 中...


'이상을 결여한 정치’
문제를 들여다볼수록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게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건전한 정치적 이성(理性)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도의 뉴델리에 가면 간디의 묘가 있습니다. 그 비문에는 생전에 간디가 했던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세계에는 일곱 개의 큰 죄가 있다. 첫째, 이상을 결여한 정치. 둘째, 노동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부(wealth). 셋째, 양심에 어긋나는 쾌락. 넷째, 인격이 결여된 학문. 다섯째, 도덕성이 결여된 상업. 여섯째,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일곱째, 자기희생을 망각한 신앙.
이 일곱 개 항목이 다 중요하지만, 간디가 특히 정치를 제일 먼저 꼽았다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 정치가 잘못되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간디는 그처럼 중요한 정치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요소가 ‘이상(理想)’이라고 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는 현실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주의만이 전부라면 정치는 야바위꾼들의 권력쟁탈 이외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어쩌면 인류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지난 수백 년, 한국이라면 지난 몇십 년 동안,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당연지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정치지도자들이 얼마나 정확히 꿰뚫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목은 대단히 높은 윤리의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타자―동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 그리고 미래세대―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책임한 태도를 기초로 해서 전개돼온 극히 비윤리적인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안목입니다.

혹자는 근대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규탄할 수 있느냐, 근대문명 덕분에 많은 사람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도 갖게 되었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도 누리고, 높은 생활수준과 복지혜택도 누리면서 살게 되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지식인일수록, 고등교육 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관념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근대문명이 계속돼온 세월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끝없이 학살을 당하거나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며 살아왔고, 그 상황은 지금도 변함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까 지난 500년 동안에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물질적 혜택을 실제로 누렸던 사람의 수효는 지구 전체 인구 가운데 최대 15%를 넘어본 적이 없다는 통계가 나와있더군요. 그러니까 85% 이상의 인구는 항상 15% 이하 ‘특권층’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희생을 당하며 살아온 거죠. 이제는 마지막 국면이 되니까 그 15%에 속한 계층도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1% 99%라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몰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미국이든 일본이든 서유럽이든 그동안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던 사회들에서 거의 제3세계적인 양극화 현상, 대중적 빈곤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연간 자살자는 35,000명을 넘고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4,500만 명이 넘고, 2012 3월 현재 정부로부터 식비 보조(food stamp)를 받아야 하는 미국 시민의 수는 4,600만 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실업문제의 심각성은 선진국들의 공통 현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민자 배척 운동이 소위 선진국들에서도 급속히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경제상황이 나빠지면 인종주의, 민족주의, 혈통주의가 쉽게 발호하는 법이지만, 최근에는 복지선진사회라고 하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나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의 퇴행이 시작된 거죠. 경제성장이 순조롭게 계속될 때에는 빵을 크게 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지켰지만, 이제는 그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를 안정시키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지, 정말로 지혜로운 정치가 기능을 하지 않으면 안될 엄중한 상황입니다. 그게 안되면, 파시즘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입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논의가 꽤 진전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일본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성장 없는 시대의 국가를 구상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의 공동 저술인데, 편집자는 지금 일본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열렬히 반대논리를 펴고 있는 나가노 다케시(中野剛志)라는 경제학자입니다. 현재 교토대학 교수로 있는 이 나가노라는 사람은 원래 일본의 경제산업성에서 일하던 관료였습니다. 일본의 경제산업성이라면 우리나라의 재정경제부와 지식경제부를 합친 곳이라고 할만합니다. 요컨대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정부의 핵심 부서인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 정부에서 일하던 수년 전에 몇몇 학자들과 경제산업성 간부들을 규합해서 연구회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벌써 1990년대 초 버블경제가 붕괴하면서 계속 저성장 내지 마이너스 성장 상태지만 여전히 국가정책은 성장 기조의 회복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장경제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고, 그 대신 성장이 중단된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나갈지를 궁리하는 게 절박하다는 문제의식 밑에서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년 동안 열번 정도 세미나를 개최하여 활발한 토론을 거쳐서 세상에 공개한 것이 《성장 없는 시대의 국가를 구상한다》라는 책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이 책의 내용보다도 정부의 경제정책을 다루는 현직 고위 관료들이 그 세미나에 활발히 참여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일본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그리 만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처하는 일본정부나 지도층의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자세를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책을 보면 또다른 일본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미 중요한 선각자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원래 대장성(?) 관료를 지내다가 1960년대 전반 일본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체계화했다고 알려진 시모무라 오사무(下村治)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이케다(池田) 내각 때의 국민소득배증론(倍增論)이라는 것이 바로 시모무라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고도경제성장 국가의 핵심적 경제이론가였죠.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1차 석유위기를 겪고 난 뒤에는 완전히 자세를 바꿔서 성장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경제는 더이상 가능하지도 않은 성장을 계속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중지하고, 이제는 ‘축소균형’의 길로 가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식량과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고, 농업을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선각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의 경제학자들과 현역 경제관료들이 비록 일부지만 ‘성장 없는 시대’를 위한 대안적 비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불쑥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